

1.
자정이 좀 넘은 시각이었다. 해가 짐과 동시에 전광판들이 하나 둘 켜지며 밤 거리를 천박한 색으로 발그스레 물들였다. 네온사인 아래의 거리는 붉어졌다 푸르스름해졌다 남녀가 몸을 겹치듯 색조차 전부 뒤섞여 알 수 없는 괴랄한 색상을 빚었다.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내벗고 미친년들마냥 알코올에 취해 자신을 잊으며 날뛴다. 빛은 밝을 수록 그림자가 더 짙어지는 법이다. 이 화려한 큰 길가의 어슥진 골목에선 젊은 두 남녀가 신음을 토하며 아랫도리를 부비며 세계 최후의 날 섹스라도 하는 것 마냥 어둠속에서 할딱이는 꼬락서니가 눈에 생경허니 담겼다. 가볍게 지나쳐 가며 그 모습을 다시 생각하니 꼭 죽을 것을 알고도 불길에 뛰어드는 나방 같아 비딱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은 추억이 없어 가능하면 그다지 오고싶지 않은 동네였지만, 익히 주시하고 있던 두 조직의 거래장소의 예정지가 바로 이 구역의 최대규모의 클럽이라는 정보에 퇴근길, 비공식적 사전탐사겸 발을 들여놓은 참이었다. 같이 따라온 동료가 제 마누라에 대해 지껄이는 것들을 심드렁히 들어주다 자켓의 주머니가 부르르 울렸다.개새끼. 본디 사람은 직감이란게 있는 법이다. 이미 차게 식은 휴대폰을 손 끝으로만 만졌을 뿐인데 이미 누구한테 왔는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물론 조건이 된다면 해야겠지. 그래서, 벨…?"
"잠시만요, 급하게 연락올게 있어서 좀."
황급하게 휴대폰을 켜 확인하자 아니나다를까 문자가 와있었다. 타이밍 좋게 초록불로 변한 횡단보도를 건너며 나는 놈에게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야근이야. 나 늦는다.」
귀여운 새끼. 차라리 기다리게 하느니 잘됐다 싶어, 나도 늦어라고 자판을 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시끄러운 경적소리와 더불어 헤드라이트가 얼굴을 확 비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이 쏠려있던 휴대폰 액정에서 고개를 들었다. 같이 온 이가 정신차려, 하면서 지껄이던 순간, 눈에 무언가가 잡혔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신경이 눈에 쏠린다. 훅―, 하고 눈 앞에 내가 익히 아는 누군가가 저 멀리 보도 너머에서 스쳐지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둠과 인파 속에서 어렴풋이 뒤엉켜 보이던 황갈색 머리카락, 그 체구, 걸음걸이, 순식간에 스쳐지나 사라졌지만 내가 알아보지 못할리가 없다.
르네.
아, 시팔년이.
야근한다는 새끼가 여기서 얼쩡거리고 있어? 어지간히 좆 휘두르고 다니는 발정난 그 고얀 버릇을 아직도 못고치네.
"―벨!"
뒤에서 뭐라 외치건 말건 신경질적으로 남들을 밀쳐내며 인파를 뚫고 그를 쫓았다. 앞 뒤 상황파악할 새 없이 목 끝까지 혈압이 거하게 올라 열뻗친 내 꼴이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이 분명했다. 주먹을 핏줄이 시퍼렇게 튀어나올정도로 꽉 쥐어 손톱이 여린 살결을 파고 들어 거세게 아려왔다. 혹시나, 혹시나 잘못본게 아닐까 싶은 마음 반, 잡히면 숨톡을 꽉 틀어서 죽여버리겠다는 심정 반. 그가 지나갔던 골목을 거쳐 뛰어가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거센 칼바람이 뺨가를 스쳐때렸지만 어째서인지 숨이 더웠다.
2.
횡단보도를 건너 한 블럭을 더 달려 그가 접어들어간 골목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하 술집에 마치 홀린듯 멈춰섰다. 전기선이 충돌해 스파크가 튀는 낡은 간판의 네온사인을 비쩍하게 쳐다보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엔 번쩍이는 전광판이 그림마냥 걸려있었는데, 숨 쉬기 힘들정도로 공기는 탁했다. 매캐한 연기가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이 도대체 뭐하는 업소인가 인상을 찌푸리며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흘러나오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있기만 해봐, 있기만 해봐, 입술을 끊임엇이 쥐뜯으며. 테이블과 테이블의 경계가 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곳이었다. 질펀하게 윗통을 까고 테이블 위에 누워있는 미친 놈도 있었고 바에는 마찬가지로 윗통을 벗고 제 젖가슴을 자랑하고 있는 여자들이 우후죽순 앉아 바텐더와 낄낄거리고 있었다. 어둡고 번쩍이는 조명 아래를 깨진 술병들을 피해 비척이며 쓰잘데없이 저들끼리 몸을 부벼대는 놈들을 밀쳐가며 비척이듯 걸었다.
아,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새끼. 가게의 가장 구석진 곳의 테이블에서 다리를 꼬고선 여자들 사이에 앉아 술병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찾자, 되려 열이 오르긴 커녕 천천히 머리가 차가워졌다.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꺼내들고 전화를 걸었다. 뚫어져라 받아, 받아 하면서 속으로 외쳤음에도 불가하고 전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달리 전화를 받지도 않고 그저 얘기나누던 여자들이 제 타이를 풀어 제끼든 말든 내버려두며 여전히 빙글빙글 술잔을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개년이 진짜.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제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가가려다 르네를 자연스레 스쳐지나가며 뭔가를 주고받는 남자를 보고나서야 깨달았다. 업무중이구만. 수도 없이 들어 온 덕에, 그가 경찰 딱지를 달고 무슨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지 모를리는 없었다. 단지,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는것이다. 홀로 열내고 성내면서 단편 영화 하나 찍은 스스로에게 얼척이 없어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벽에 기대어 슥 주저앉아 이것저것 떠들석 거리고 있는 테이블을 슥 보곤 한 쪽 입꼬리만 올려 비딱허니 웃었다. 이 쯤되면 슬슬 스스로가 불쌍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병신인건지 아니면 이 새끼가 개새끼인건지. 아니면 둘 다 인지. 개새끼, 개새끼 애칭마냥 불렀더니 개새끼도 전염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 처지를 처연하게 여기기는 일렀다. 이대로 돌아나가면 그게더 병신새끼지. 난 내 개에게 다른 이들에게 꼬리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
마치 처음부터 이 곳 사람인양, 이미 취해 제정신이 아닌 자의 옆에 덜그럭거리던 술병을 느른하게 집어들었다. 개판이라면 개판에 맞춰 놀아줘야지. 그게 배우의 정체성 아닌가. 아쉽게도 놈의 실적이나 업무를 배려할 마음가짐은 조금도 없었다. 화려하게 망쳐준다면 그거야말로 최고일거라 믿으며 들고 있던 술병을 한 모금 마셨다. 열기가 훅 올라오는게 목 끝에서 시작해서 가슴팍 안까지 느껴져 진동했다. 안그래도 차가워졌던 머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아 침착하게 그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느적허니 부러 몸을 꼬아가며 그의 주위를 둘러싼 여자의 어깨를 나긋하게 쓰다듬으며 등장했다.
"안녕, 아가씨들. 합석해도 될까요?"
무덤덤한 시선으로 의자에 기대어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그를 향해 외친 말이었다. 안녕, 르네. 입 밖으로 내지 않은채 뒷말은 목구멍으로 넘겨버렸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침과 동시에 술잔을 가지고 장난치던 손이 멈췄다. 무성영화마냥 일순 소리가 죽었다. 한순간 시끄럽기 그지없던 주위가 적막해지며 그의 모습만이 온전히 보였고 나는 천천히 여자들 사이를 헤쳐 그의 정수리 위에 술병을 뒤집어 술을 줄줄 부었다. 이기적이라 굴어도 상관없어. 네는 질려도 난 질리지 않기에, 꺼질수도 없어 이젠. 누런 색의 술이 정수리에서 목가로, 목가에서 쇄골가로 스르르 타고 흘러 젖는 꼬락서니가 제법 색스럽다. 저대로 붉은 루즈를 입술에 찍어 발라주고 싶은게 과장이 아니었다. 놀란 기색도 잠시 당혹스러워하던 그의 얼굴이 천천히 비틀어진 미소로 변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술병을 텅텅 비웠다.
다른 사람이 끌러놓은 셔츠깃을 뜯어버리고 싶어. 네 흰셔츠 아래에 찍어놓은 붉은 루즈 자국은 여기 네명의 아가씨들중 어떤 아가씨걸까. 한 명씩 차례차례 그녀들의 주둥이를 비틀어서 칼로 쑤셔 찢어놓아야 네가 정신을 차릴까. 끔찍한 검은 말들을 입 안으로 집어 삼켜 꾸역꾸역 눌러 담는다. 함부로 뱉을 수 없는 말들. 여자들이 놀라 웅성거리든 말든 나는 허리를 굽혀 그의 술로 끈적거리는 뺨가를 쓰다듬었다. 비릿한 술 냄새가 탄환마냥 코끝을 꿰뚫어 안팎을 침범했다. 지독한 냄새에 일순 어질한 기분이었다.
"―얼씨구, 리히트."
그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비딱하게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는 언젠가 부터 나처럼 미소를 비뚤어지게 짓기 시작했다. 그게 언제인진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네가 날 닮은 표정으로 너만 부를 수 있는 그 이름을 부른다면, 내가 느끼는 이 것은 분명 오르가즘이란 것이겠지.
"나 네가 누군지 모르는데."
거기까지 말하고 그의 턱을 쥐어 이 모 저 모 살펴보았다. 나는 입 꾹 다물고 나를 쳐다보는 그를 향해 조소를 날려준 뒤 말을 덧붙였다.
"내가 아는 어디 사는 개새끼랑은 좀 닮았고. 그 개새끼는 지금 얌전하게 야근중이거든. 그러니까 넌 아니겠지."
뻔히 알면서 지껄인다. 아는 척 해주고 싶지 않았다. 배려할 생각도 없었다. 마음껏 해명해봐. 그런데 또 경찰 배찌를 저 아래에 차고있는 한 그건 곤란하겠지. 최대한 핀치에 몰아넣는다. 어디한번 설득해보라는 얼굴로 눈쌀을 찌푸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데구루룩 눈알이 굴러가는 모습에 처지도 있고 웃어버렸다. 그는 제 손등으로 얼굴을 닦아내며 의자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 여기 신사님이 나랑 급한 이야기좀 해야겠단다. 언니들은 놀고 있어."
그렇게 나와야지.
3.
"좋아, 말 안한건 내가 잘못이라 치자. 근데 이건 엄연히 내 일이야. 어디까지 간섭할 생각인데?"
가게 밖의 찬 바람에 고작 한 모금 마신 술의 취기가 깼다. 분위기에 취한 모양이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벽에 그를 기대워 세워둔채 마치 벌이라도 주는 것 처럼 사뭇 무서워보이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보았을 뿐이다. 번쩍이는 마젠타의 형광빛 네온사인 덕에 그의 얼굴에 서늘한 조명이 내리앉았다. 한참동안 숨을 들이키고 내쉬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 레퍼토리 반복할래. 너는 도망치고 나는 잡으러 다니고. 술래잡기하냐."
"어이고, 책임전가 봐라. 난 도망친적 없어. "
"이런데 다니지말란 소리야."
"내 일이라고 몇번 말해. 니 새끼가 의심병걸린거지. 아니다, 의부증?"
"내가, 언제까지 너한테 이렇게 굴어야 해? 니 남편 쿨하게 살게 좀 내버려두지 그래."
내 진지한 태도에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있다가 훅 하는 입김을 장난스레 내뱉었다. 파스스 흰 연기가 내 얼굴에 채 닿기도 전에 갈라지다 흩어졌다. 그는 천천히 내 양복자락을 만지작 거리며 넥타이를 느른한 얼굴로 잡았다. 그러고선 어떤 웃음인지도 모를 감정을 내비치며 천천히 조르기 시작했다. 질척한 손길이 엉겨붙어 뭐 어떻게 달리 반응 할 새도 없이 그는 내 목가를 움켜 쥐었다. 숨이 옥죄인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며 신음을 토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웃기지마. 누가 쿨해지래? 언젠가 정신을 차려보면 나없이는 숨도 쉬지못하는 병신새끼로 만들어줄거라 했잖아."
그는 웃고 있었다. 환하게. 너무 예뻐서 꼭지가 돌아버릴만큼. 나는 그를 쳐다보며 비릿하게 마주 미소를 만면에 띄워주었다. 그대로 내 목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쥐어 놓곤 술로 젖어 끈적해진 뺨가를 부여잡고 입을 맞췄다. 온갖 감정으로 뒤틀린 얼굴을 한 그에게 그 어떤 감정도 내려놓고 단순하게 입을 맞췄다. 평소처럼 분노해 거세게 혀를 얽혀 섥은 것도 아니었고 짙게 뿌리까지 끌어당겨 치아를 핥아낸 야한 키스도 아니었다. 단지 입술만 부볐을 뿐이었다. 거리를 지나쳐오며 보았던 연인들처럼 거칠게 추삽질을 하며 섹스를 한것도 아닌데 흥분되어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생각이 온 머리를 지배했다. 한시간만에 분노 슬픔 처연 황홀 온갖 감정을 다 겪는구나. 아. 이게 사랑이라면 사랑이겠지. 가볍게 입을 맞추며 모든 일이 해결된것 마냥 조용히 눈을 감고 내게 입술을 대주는 그의 손목을 부여쥐고 손톱을 박아 넣었다. 마치 주인이 제 개에게 표식을 세기듯.
실은 더 이상은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뭐라 지껄이든. 여실히 입을 맞추는 내내 나는 내 사무실 어딘가에 던져뒀을 위치추적기를 어디에 두었는지 열심히 머리 굴려가며 생각중이었다. 그게 어디에 있더라. 아, 내가 이런 놈이지. 스스로에게 탄복하며.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