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0.

 

 

 

 

 

 

갤러리를 하던 어머니의 취미는 도기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집에는 경매장에서 수십억을 호가하는 고가의 도예품들이 제법 많았는데 아홉살 무렵, 장난기 비행기를 조종하다 깨트린 적이 있다. 아시아 근방에서 들여온 비싼 도기였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당혹스러워 서랍 속의 본드를 꺼내어 붙여보려 노력 했다. 날카로운 사기조각에 베여 손가락에 피가 엉겨붙었음에도 손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 날 해가 질 때까지 몰래 방에 숨기고 들어가 어떻게든 조각을 맞춰보려했지만 이미 깨진 조각들은 엉겨붙지가 않더라. 간신히 붙였다 생각하는 순간 와르륵 무너지기 일 수 였다.  

 

 

 

 

결국 저녁 식사 시간, 사실대로 고하자 어머니는 예상과는 달리 내게 매초리를 들지 않았다. 대신 찢긴 손가락에 연고를 발라주시며 두가지를 가르쳐주셨는데, 그 중 하나는 한 번 깨진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이 값비싼 조언은 내 삶을 지침해주는 북극성으로 품고 살아왔다.  

 

 

 

 

 

 

 

 

1.

 

 

 

 

 

 

 

서론이 길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이 것보다 좀 더 진부한 이야기로, 지구별에 사는 평범한 여우에 관한 이야기다. 여우는 길들여지길 스스로 원한적은 없었지만, 어느새, 젖어들듯 그렇게 어린 왕자에게 저도 모르게 길들여진걸 깨달은거지. 갑작스레 제 세상에 등장한 어린 왕자는 여우를 뿌리채 뒤흔든다.

 

 

 

 

"가령, 네가 오후 네시부터 온다면 난 세시부터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갈 수록 더 행복하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갈 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시가 되면 난 벌써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가를 알 수 있겠지."

 

 

 

 

온전히 내 앞 길만 걸어온 나를 흔들지마. 단죄, 이 것 하나 바라보고 살아왔는데 어린왕자는 여우를 손쉽게 무너트려버려 단숨에 무장해제를 시켜버렸다. 여우는 스스로의 구차한 감정을 감추다 결국 참지 못한 채 좀 더, 드러내기 쉬운 감정부터 하나하나 까발린다. 한꺼풀, 한꺼풀 벗기게 되며 여우는 제 비참한 미래를 예견한거지. 아, 나는 바닥까지 긁어서 내어 주겠구나. 가장 보여주기 쉬운 호감을 알려주곤 연달아 자신의 질투를 보여주고, 그가 겁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제 죄책감과 욕구를 고해성사마냥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지 않은 채 그에게 구깃구깃 접은 종이에 적어 넘겨줘버린다.

 

 

 

 

"아..!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네 탓이야." 


여우의 말에 어린왕자가 말했다.

 

"나는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네가 길들여 달라고 해서."

 

여우가 대답했다. 

 

"그건 그래."

"그런데 넌 울려고 하잖아...!"
"그래 맞아."
"그렇다면 넌 얻은게 하나도 없잖아!"
"얻은게 있어."


여우가 대답했다.

 

"밀밥 색깔이 있잖아."

 

 

 

 

 

 

그리고 나의 어린왕자는 지구별에서 떠났다. 결국 진짜도 아니었던 두 개의 시계를 껴안고 뱀과의 계약을 통해 죽은듯이 평온하게 이 곳을 떠나버렸다. 우스운 일이다. 무엇을 위해 너는 달렸나. 결국 내가 얻은 것이라곤 이미 기억 속에서조차 가물한 너의 밀빛이었던 머리색 뿐이었기에.

 

 

 

 

 

 

 

 

 

2.

 

 

 

 

 

 

하나만 좀 묻자. 왜 돌아온건데.

이젠 다른게 시들해졌든?

 

 

 

 

내 목덜미까지 물어뜯어 완전히 숨통을 끊어놓고 싶은 모양이구나.

비겁한 개새끼. 나는 감히 그 것을 너의 이기라 칭하겠다.

 

 

 

 

 

 

3.

 

 

 

 

 

나의 결벽증은 천성이다. 남들과 같은 결벽증이 아니다. 의료학계의 어느 병명에도 존재하지 않는 벨 코츠 고유의 병이기에, 나는 그 것을 결벽증이라 임의로 칭했다.누군가 제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했고 더 나아가 자신이 아닌 것을 손댈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 결벽증은 앞서도 언급한 천성과 자라온 배경이 얽혀 결국 나를 제지하는 하나의 목줄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나는 이 것을 이성의 끈 또는 덫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그 덫에서 발을 빼면, 어떻게 될까.

 

 

 

 

난 너가 바라는 그 인간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 점 만큼은 분명히 확신할 수 있다.

 

 

 

 

삽을 하나 꺼내들어 나의 개새끼를 묻었고 그 자리에 널 닮은 노란 꽃을 하나 심었다. 연장을 쥔 힘줄이 솟아 올라 터질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땅을 파내어 내 짙은 감정들을 그 곳에다 그득허니 묻었다. 거기엔 사과나무를 심으리라 내 스스로 다짐했었다. 그 사과나무 한 평만큼의 공간을 내 마음 속에 묻은 어떤 개새끼를 위해 남기리라. 그런 마음 이었다. 언젠가는 분명 결혼도 할거고 아이도 생기리라 생각했다. 분명히―그러리라 믿었다. 

 

 

 

 

내 안의 중요한 것이 없어져도, 나는 살아갈 줄 안다. 나의 연기는 몹시도 뛰어나 나 조차 속여버리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밤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저 벽 너머의 이름 모를 이웃조차 알지 못하게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숨막힘을 참고 고요하게 울었다. 혹시라도 누가 젖은 시트를 발견할까 두려워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울었다. 

 

 

 

 

 

 

4.

 

 

 

 

 

다시 파묻었던 것을 끄집어낼 만큼 나는 잔악무도 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다시 삽을 든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인간이다. 너를 미워하되, 온전히 미워하지 못한다. 너를 사랑하되,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 이는 순수한 사랑보단 소유욕에 가깝고 소유욕보단 애증에 가깝다. 나를 물어 뜯은 개새끼를 용서할만큼 나는 자비롭지 못하지만 그 개에게 내 전부를 걸만큼 멍청하고 아둔한 인간이기도하다.

 

 

 

 

 

 

5.

 

 

 

 

 

 

 

하나만 좀 묻자. 왜 돌아온건데.

이젠 다른게 시들해졌든?

 

 

 

내 목덜미까지 물어뜯어 완전히 숨통을 끊어놓고 싶은 모양이구나.

나는 멍청하게 다시 목을 내놓는다.

 

 

 

아둔한 병신새끼. 나는 이 것을 아둔함이라 칭할것이다. 누군가 나를 장님이라 불러도, 농아라 불러도 할 말이 없다.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그래, 내가 이런 병신이다. 혹자들은 나를 비난 할지도 모르겠다. 학습력이 없냐는 물음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몇 없다. 감정을 깊은 구덩이 속에 파묻어도 마치 징표인양 손가락 끝엔 여전히 헤져 이미 닳아버린 낡은 개끈을 매어두고 사는 미련한 인간인 탓이다. 

 

 

 

 

난 너가 바라는 그 인간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 점 만큼은 분명히 확신할 수 있다. 덫에서 기어나온 순간 난 너에게 내 자신을 허락할거고, 너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나는 소유욕은 네 상상 이상으로 대단해서, 나의 개가 다른 곳에서 꼬리 흔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거든. 너의 목을 쥐고 영원이란 말이 우스운 긴 세월을 가지려들 것이다. 필요하다면 다른 곳에 눈길을 주지 못하게 시력을 상실시킬지도 모르고 도망치지 못하게 아킬레스건을 끊을 용의조차 있다. 이런 주인한테 돌아와 손에 끈을 쥐어준다고? 미련하구나 개새끼야, 너는. 도망칠 기회를 수차례 주었고 실제로 나를 떠나간 주제에 어째서 돌아왔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구질구질하지만 다시금 네가 손에 쥐어준 끈을 받는다.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라하더라도, 이미 오버페이를 자청하며 모든 것을 내놓은 내게 남은 것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6.

 

 

 

 

 

 

결국 저녁 식사 시간, 사실대로 고하자 어머니는 예상과는 달리 내게 매초리를 들지 않았다. 대신 찢긴 손가락에 연고를 발라주시며 두가지를 가르쳐주셨는데, 그 중 하나는 한 번 깨진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나머지 한가지는, 사람의 살갗은 유리와는 다르게 아문다는 것이었다. 그 어떤 유리조각이 살을 찢어 결국 흉터를 남긴다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아무는 법을 안다는 것을 그녀의 손길에서 배웠다. 

 

 

 

너와 나는 도자기가 아니기에.

 

 

 

마음 속에 심으려 두었던 사과나무를 오늘자로 베었다. 제법 거대한 나무라 나는 벨지 말지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고, 도끼로 찍고 찍고 찍어대야 그제서야 넘어가더라. 사과나무를 벤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개집을 하나 지으려고 한다. 어떤 멍청한 개새끼 한 마리를 묶어 둘 만한 튼튼한 개집을. 

 

 

 

 

결코 도망가지 못하도록.

 

 

 

 

 

 

 

 

 

 

 

 

 

 

*fin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