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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요한 정적 속에서 시계소리만 째깍이는 새벽녘,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당연한 절차인듯 손을 옆으로 더듬어 웅크려 잠든 그를 손바닥으로 한번 쓸어본 뒤 꽉 끌어당겨 껴안았다. 한참동안 뚫어져라 편안히 잠든 얼굴을 쳐다보다 뺨가를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잠자는 너의 숨소리를 외운다. 네가 살아있다. 다행이다. 아, 이 것은 하나의 습관이다. 혹시나 네가 또다시 발작하며 깨지 않을까 하여 내가 먼저 일어나 너를 준비하는 것이다. 목줄을 매어 집으로 끌고 왔던 첫 날밤 새벽에 일어나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발작하던 그를 보며 당황했고, 두번째 밤엔 익숙해졌으며, 세번째 밤부턴 그보다 먼저 깨어나 준비하기 시작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양 구는 그에게 생각보다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었다. 다른 것보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분명히 그가 잠결에 부르짖는 것은 저가 아니라는 것.

 

 

날 두고 가지마―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징하게 울렸다. 날 부르지 않았다는 걸 알아. 아마 르네, 그래 제 이름이라 칭하는 르네라는 여자를 향하는 것을 나는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는 '르네'를 사랑하기에, '르네'를 질투한다. 이미 죽은자를 시기하는 꼬락서니가 우습다. 인정하자, 내가 그런 새끼다. 삐꺽일리가 없는 침대가 흔들거린다는 착각을 받으며 그의 허리께를 꽉 끌어안아 쇄골가에 이를 눌러 박았다. 내가 가졌어. 내가 가졌다고. 그 무의식까지 질투하는 나는 실로 이기적인 얼간이가 아닌가, 홀로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2

 

 

 

 

 

 

청아하게 입가에서 퍼지는 박하향을 느끼며 막대에 이를 박아 빨아들이다 훅 하고 연기를 내뱉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이나 담배를 지져 껐다 제 자신을 향해 던지는 비웃음이었다. 변화란 실로 무서운 것이다. 무대에서 내려와 단죄니 복수니 지껄이던 새끼는 또다시 그 판을 떠나 새로운 무대를 찾았다. 여태까진 집요한 복수물이었다면 이번 장르는 로맨스- 를 가장한 호러. 분명한 건 내 삶으로 뛰어든 개새끼 한마리 때문에 이 갑작스럽게 변한 인생의 장르를 보며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책임전가라는 것이다. 여지껏 증오로 해소하던 감정의 과잉을 주체하지 못해 그에게 소유욕이란 지저분한 감정을 쓸어넣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 이전까지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던가. 가봤자 남은 것은 어느 것도 없었다. 여자는 죽었고 아이도 죽었다. 모든것을 버리고 무대에서 내려온 이에게 근처에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 오피스텔은 늘 휑하게 비어있었고 그 차가운 공간은 결코 집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저 거처. 언제 떠날지 몰라 최소한의 가구만 채워넣은 곳에 의미가 생긴건―, 

 

 

아. 낯간지러워. 정신병자 마냥 혼자 웃다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렸다. 북슬거리는 황갈색 머리카락. 그 눈에서, 그 코에서, 그 입에서 묻어나오는 짓궂음. 타고흐르는 눈물. 제 팔에 나의 이름을 새겨 후두둑 떨어지던 핏방울.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기 하나하나, 피 한방울마저 그 전부를 나는 가져야해. 무의식마저. 전부. 그는 제  장애를 감내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난 아니야. 난 결코,

 

 

 

날 두고 가지마―

 

 

내 침대 위에서 적어도 나와 함께 있을 때 만큼은 네가 다른 여자를 찾는걸 용납할 수 없어.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스스로를 혐오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3

 

 

 

 

 

 

 

황급히 퇴근하고 집구석으로 기어들어왔다. 다행스럽게도 개새끼는 없었다. 나조차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정신병자 마냥 쇼파를 뒤엎고 쿠션을 던지고, 화병의 꽃들을 다 덜어내어 바닥까지 살피며 마룻바닥에 집어던졌다. 숨을 할딱이며 암팡지게 정리된 부엌 집기들을 모두 바닥에 부어 통들을 하나하나 살폈고 침대의 이불들을 모두 내팽겨치고 메트리스를 덜어냈다. 어디에도 없다. 내가 찾고 있던건, 아주 작고 엄지만한 어떤 물체. 그 것을 찾고 있었다. 찾아야한다. 서랍이란 서랍은 전부 다 열어보다, 장식장의 가장 아랫칸에서야 나는 찾아낼 수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반짝이는 물체를 집어들어 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충동적인 일이었다.

 

 

나는 다 가져야해. 미쳐가고 있었다.

 

 

날 두고 가지마―

 

 

거칠게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를 찍어 눌렀다. 피토하듯 자판 하나하나를 감정을 다해 눌렀다. 달달 떨리는 손을 진정하지 못한 채 잇새를 짓이겨댔다. 받아. 문자 받아. 빨리.

 

 

Text [ 나와. 당장.]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곧장 휴대폰이 울렸다. 세번 정도 신호가 올 때까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호흡을 진정했다. 그리고 그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쳐 빠르게 지껄였다.

 

 

"존나 아프다고 조퇴를 하던지, 사건이 터졌다던지, 경찰총잘님이 널 불렀다던지, 리히트 테일이 니가 지금 좆나게 보고싶다고 하던지 핑계 아무거나 말하고 뛰어 나와. 빨리. 집 앞으로."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나는 그대로 통화를 종료하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한차례 전화벨이 더 울렸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차 키를 챙긴 채 현관문을 나섰다. 종지부를 찍겠다는 굳은 결의였다. 주머니에 담긴 물체를 손가락으로 까드득 까드득 굴렸다. 아. 널 부숴버리고 싶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미친 생각에 고개를 내저었다. 내 손아귀에 바스라져버린다면 가루를 그러 모아 병에 담아 목에 거리라. 소란스러운 잡념들이 복도의 적막을 집어삼키는듯 했다.

 

 

 

 

 

4

 

 

 

 

 

 

"왜. 왜 그러는데, 새끼야. 내가 납득 가능하게 설명해."
"나왔잖아. 어쨌건."

 

 

이어지는 불평 불만에 한마디로 일축하고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시선을 돌려 운전대를 잡은 그를 쳐다보다 나는 괜시리 낯뜨거워 고개를 숙였다. 차는 무한하게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내 대답에 열뻗친 모양인지 속도 계기판이 쫙 올라갔다. 미친새끼. 이렇게 밟으면 손잡고 사이좋게 황천길가겠다. 그 소리를 주억거리려다 입 안으로 씹어삼켰다. 운전 못하는게 한이다. 내가 운전대를 붙잡고 거칠게 달렸어야했다. 이 가슴깊은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다니.

 

 

"명령조 말고 다른건 못해?"
 

 

사뭇 짜증스러운 말투에 미약한 죄악감이 들어 나는 양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가 원하는데로 의중을 고대로 까면 여기서 운전대를 놓고 날 버린채 가버릴 것 같았다. 용납할 수 없어. 머릿속에 왱알왱알 시계라도 돌아다니는지 골이 울린다. 그가 화를 낼 틈도 주지 않고 눈 앞에서 미리 해치워버릴 속셈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알맞은 배경이 필요하다. 르네에게 안녕을 고할 피날레를 장식할 곳이다. 

 

 

"왜그러냐고! 지금 내 얼굴 쳐다보지도 않잖아. 뭔 속셈인데."

"밟아. 오늘 밤엔 돌아가야해. 해 떨어지기 전에 빨리 가자. 멍멍이."
"여기서 멈출거야. 리히트, 내가 못할 놈으로 보여?"
"어. 못할 놈으로 보여."

 

 

제 직장에서 무슨 핑계를 댔는지 뛰쳐나온 그에게 나는 밑도 끝도 없이 바다를 가자고 지껄였다. 몹시도 유치하게. 황당해 나를 쳐다보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한번 힐끗 신경질적으로 운전중인 놈을 흘겨보다 눈을 감아버렸다. 모르겠다. 나도 사실. 한참을 자고 일어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뜨자 어슴프레한 저녁이었다. 적막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시선과 마주쳤다. 우리는 잠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질척이며 얽혀 교환하는 시선 속에서 죄책감에 나는 이미 뜯길데로 뜯긴 입술을 쥐뜯었다. 먼저 정적을 깬건 내 쪽이었다.

 

 

"깨우지 그랬어."

"그래서 왜 오자고 한건데. 나 불안하게 하지마. 리히트."

"나가자."

 

 

앞 문을 열었다. 파도가 철썩이고 있었다. 해변 특유의 시큰한 짠내가 확 코끝을 스쳤다. 그는 나를 따라오지 않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그저 한걸음 두걸음 모래사장으로 걸어가는 내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뒤를 돌아 다시 한번 세 걸음정도 벌어진 거리에서 나는 앞으로 가자 턱짓을 했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얼씨구. 난 말 안 듣는 개새끼야. 이유를 안 알려주면 안가."

"알아."

 

 

아. 그래.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 팔목을 부여잡았다. 넌 고집 센 개새끼였지. 붙든채 강제로 바다가 찰싹이는 해변가까지 말없이 끌고 갔고 물가에 도달해서야 그는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내가 무언가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참을 만큼 참았어. 왜 오자고 했는지 말해. 내 얼굴 똑똑히 쳐다보고."

"한대 치게?"

 

 

가볍게 지껄이곤 주저앉아 끊임없이 잔잔하게 밀려드는 바닷물을 손에 쥐었다. 지금 이 순간이여야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젖은 손을 주머니에 집어 넣어 들고온 목걸이를 꺼냈다. 유리병 모양의 작은 목걸이. 그가 소중하게 쥐고 다니는 목걸이. 나를 미치게 만드는 목걸이. 나는 오늘 르네를 또 한번 죽일 것이다. 이것이 모독이라는 것을 안다. 손데선 안될 선이란 것 역시 모르는 것 아니다. 나는 경계를 넘겠다 너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다. 더 이상은, 싫어.

 

 

그의 눈이 커진다. 더 모션을 취하기 전에 나는 목걸이를 주먹을 쥐어 꽉 깨부쉈다. 파삭, 거리는 파열음과 함께 유리조각이 손에 더덕더덕 박혔다. 끔찍한 통증이 온 몸을 타고 흘렀지만 되려 전율이 흘렀다. 검붉은 피가 흘러내려 손바닥에서 팔목으로 후두둑 엉망으로 떨어지는 꼬락서니를 보며 희열이 느껴지는걸 보아하니 나는 제대로 미친 모양이다. 이 것은 하나의 의식이다. 오늘자로 그녀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인 여자, '르네'에게. 망령주제에 내 개새끼에게서 꺼지라고. 내 호흡을 방해하지 말라고. 그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나를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났다. 

 

 

"잊어. 다 잊어."

 

 

잊어.

다 잊어.

 

 

저에게 하는 소린지 그에게 하는 소린지 나 조차도 이해가 안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파사삭 튀기는 유리조각들이 박힌 손은 바다에 털어 파도에 쓸려 내보냈다. 네 과거의 흔적을 완벽하게 바다에 흘려 내보낸다. 이는 쌍방동의 없이 나 혼자 독단적으로 진행한 일이다. 그러니까, 평생 내게 욕을 하고 화를 내. 여전히 유리조각이 시퍼렇게 박혀있는 손바닥을 펼쳐 하나씩 하나씩 잡아뜯어 바다에 흘려내보냈다. 피가 뭉근하게 흘러내려 바닷물과 뒤섞여 발 아래의 어둠속임에도 불구하고 바닷물이 붉은 것은 확연히 알아 볼 수 있었다. 이해하지마. 이해하려고도 들지마. 그냥 잊어. 전부. 그러라고 깬 것이니.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에 그를 쳐다보고 비딱하게 웃어버렸을 뿐이었다.

 

 

"이제 쳐."

 

 

완벽하게 전부를 책임질거라 이 병을 깨트리기로 마음 먹은 순간 맹세했으니. 너에게 내가 감내해야할 짐이라면 너는 나를 숨쉬게 하는 호흡이다. 그리고 그것이 흐트러지길 원치 않은 것은, 내 이기임이 분명하기에. 밤 바다가 찰싹이고 있었다. 르네와 르네의 기억이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에 흡족스러워 비죽이 웃음이 나왔다. 내 자신이 소름끼치는 순간이었다. 이 비틀린 애정의 끝이 어디인진 너와 나만이 알고 있겠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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